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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서 오르가슴을 느낀 남자, 김영갑

지난 1월 제주로 연수를 다녀오면서 김영갑 갤러리에 처음 들렀습니다. 연수나 여행으로 제주에 갈 때마다 여러 사람에게 김영갑 갤러리를 추천받았건만, 그때마다 일정이 맞지 않아 미루었다가 올해엔 벌써 두 번이나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 다녀왔습니다.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을 처음 갔을 때, 그가 찍은 사진을 보고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경험하였습니다. 바람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김영갑은 '바람을 사진에 담는 작가'입니다.

 

그의 사진을 처음 보고 가장 강렬했던 느낌은 사진에 '바람'이 담겨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주를 삼다도라 부르는 것은 바람과 돌과 여인이 많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돌과 여인을 사진에 담는 것이야 누구나 할 수 있는데, 작가 김영갑은 제주의 바람을 사진에 담았더군요.

 

1시간 남짓 갤러리 '두모악'을 둘러보다 김영갑의 삶과 사진에 매료되어 그가 유작으로 남긴 책 <그 섬에 내가 있었네>(휴먼앤북스 펴냄)를 샀습니다. 1월 처음 두모악을 다녀와 홀린 듯이 그가 남긴 책을 읽고 2월에 두 번째로 '두모악'을 다녀왔습니다.

 

이번엔 함께 연수에 참여한 일행들을 모두 이끌고 가면서 제주여행에서 빠뜨리면 안 되는 장소라고 강력하게 추천하였지요. 2월에는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을 가기 전날, 작가가 오랜 시간과 열정을 쏟았던 '용눈이오름'을 다녀왔습니다. '두모악'의 사진을 처음 본 일행들 대부분은 그의 사진에서, 특히 용눈이오름을 찍은 사진들에서 '시리도록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제주의 자연을 영혼에 새긴 작가

 

<그 섬에 내가 있었네>는 제주의 자연을 영혼에 새긴 사진작가 김영갑의 작품일지와 같은 책이며, 루게릭병을 앓으면서도 갤러리 두모악을 만드는 데 혼신의 힘을 쏟으며 고통을 견딘 작가가 세상에 남긴 회고록 혹은 자서전과 같은 책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사진만을 찍으며 살았던 김영갑은 한쪽 어께에는 20kg이 넘는 사진장비를 메고 다녔고, 또 다른 어께에는 늘 가난과 궁핍한 생활을 메고 다녔다고 합니다. 끼니를 때우지 못하는 괴로움을 견디며 작업하고 버스비를 아껴가며 촬영을 다녔다고 합니다.

 

"우유 한 잔 마실 여유는 없지만 필름과 인화지만큼은 늘 여유가 있어야 한다. 양식이 떨어지는 것은 덤덤하게 넘길 수 있어도 필름과 인화지가 떨어지면 두렵다. 끼니를 때우지 못하는 괴로움은 작업하며 견딜 수 있지만, 필름이 없어 작업을 못하는 서글픔만은 참지 못한다." (본문 중에서)

 

돈이 되는 사진 대신에 자신이 찍고 싶은 사진을 찍으며 살았기 때문에 늘 궁핍한 생활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없으면 굶고 라면마저 여의치 않으면 냉수 한 사발로 끼니를 대신하였다는 것입니다.

 

거처를 구하는 것조차도 늘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신원이 확실치 않은' 외지 사람이었으니 방을 빌리는 것이 쉽지 않았고, 새벽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촬영을 다닌 탓에 간첩으로 몰린 일도 있고 경찰서 대공과 형사들에게 가택 수색을 당하기도 하였다는 것입니다. 카메라를 들고 오지 마을을 어슬렁거리다가 지서로 끌려가는 일도 더러 있었다더군요.

 

작가 김영갑은 의식주가 모두 힘들었지만 참 모질게도 사진에 몰두하였다고 합니다. 뭍에서 찾아오는 가족과 친구도 마다하고 주인집 전화번호 조차 알려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처절하게 내 자신을 몰아갔고, 철저하게 외부와 단절시켰다…… 생활리듬이 깨지면 사진 작업에 지장이 생긴다. 소중한 시간을 불필요하게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 여자에게 행복한 삶을 보장할 수 없는 한 결혼하지 않으리라 마음을 다잡았다." (본문 중에서)

 

그 뿐만이 아닙니다. 한적한 중산간 마을에서 사는 것으로도 모자라 한라산 중턱 표고버섯 재배막사에서 사계절을 보낸 일도 있다고 합니다. "비라도 뿌리는 날이면 호젓하다 못해 암울한 고독감이 밀려드는" 무인도와 다를 바 없는 산중이었다고 하지요.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오직 사진 작업에만 몰두하며 평범한 삶을 거부하고 남들이 보기에 '미친놈' 혹은 '정신 빠진 놈'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중산간 외딴 마을에서 10년을 지내면서 인간이 자연의 일부임을 깨달았으며, 바로 그 깨달음을 사진에 담았던 것이지요.

 

 

자연의 일부가 되어서 자연을 사진에 담았던 작가

 

예컨대 그의 사진에는 억새가 담겨 있습니다. 그는 새싹이 나오는 5월부터 키가 2미터나 자라고 꽃대가 굵어지고, 꽃들이 바람에 나리고 앙상한 줄기만 남는 변화의 과정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사철 억새와 함께 생활하는 나는 억새의 변화에 따라 기분도 변한다. 내 기분에 따라 정원의 분위기도 쉼 없이 변한다. 내 감정은 고여 있지 않고 주변 분위기에 따라 흐른다. 중산간 초원 억새의 아름다움은 시시각각 변한다…… 어떤 빛에서 사물을 보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본문 중에서)

 

자연과 교감하는 예술가의 모습을 확인시켜주는 대목입니다. 작가 김영갑이 자연과 교감하는 삶을 살았던 한 장면을 더 소개해 드릴까요?

 

"장마철이면 안개 짙은 날 치자꽃 향기에 취해 마시는 커피 맛은 유별나다. 눈이 소복하게 쌓인 날 보름달을 보며 마시는 차 맛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나만의 즐거움이다." (본문 중에서)

 

바로 이런 대목들입니다. 그의 사진에 제주 토박이들도 처음 보는 제주의 아름다운 산과 들과 나무와 풀, 바람과 구름을 담을 수 있었던 것은 자연과 교감하는 능력이 남들과 달랐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마침내 오름에서 오르가슴을 경험하였노라고 고백합니다.

 

"도시보다는 자연에서, 낮보다는 밤에, 나의 성감은 자극을 받는다. 건조한 곳보다는 습한 곳에서, 햇빛 쨍한 날보다는 안개 짙고 가랑비 내리는 날이면 발동이 걸린다. 여름이면 여름대로, 겨울이면 겨울대로 느낄 수 있는 오르가슴. 소나기 지나고 무지개 뜰 때면, 바람 심한 억새꽃 춤추는 한낮에도, 하늘과 땅이 사라지는 눈보라 속에서도 오르가슴은 찾아온다." (본문 중에서)

 

꿈 속에서 몽정을 경험하듯이 자연에서 오르가슴을 경험하였다는 것입니다. 김영갑은 자연에서 절정의 오르가슴을 경험하고 난 후 자연을 떠날 수 없었노라고 고백합니다. "자연을 통해 풍요로운 영혼과 빛나는 영감"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간절한 바람마저도 사라지는 어떤 '경지'에 다다르곤 하였다는 것이지요.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 전시된 그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면 '영적인 수도자'의 느낌이 전해옵니다. 자연과의 교감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명상' 혹은 '수련'이라 불러도 좋을 만한 삶을 살았더군요. 예컨대 마음이 울적한 날은 바느질에 매달렸다고 합니다.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는 그 가슴 설렘을 기대하며 밤을 새워 바느질을 한다. 잠자리에 누워도 정신이 말똥말똥하면 일어나 불을 켜고 바느질을 한다…… 그러면 온갖 시름이 사라진다." (본문 중에서)

 

헝겊 조각을 모아 조각보를 만들고 조각보를 재단해서 커튼도 만들고, 정성들여 바느질 하여 옷도 만들어 입었다고 합니다.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달랠 때, 울적한 마음을 달랠 때 바느질을 하였다더군요. 정말이지 수행자, 구도자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었지요.

 

삽시간의 황홀을 찍는 사진가

 

책의 사진작가 김영갑의 제주 생활에 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지만 후반부는 그의 사진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자연을 사진에 많이 담았던 김영갑은 '자연을 의지해 살아가는 이들은 자연의 변화에 민감'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자연을 담으려면 자연의 순환법칙이나 우주의 운동 원리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대개 노을 사진을 찍을 때 해가 수평선 너머로 잠기면 카메라를 챙겨 돌아온다. 그러나 십오 분쯤 후의 노을은 더욱 장관이라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그 황홀한 아름다움은 단 이삼 분 안에 사라진다. 해가 솟기 이삼십 분 전의 청자빛 하늘은 한겨울이 으뜸이다." (본문 중에서)

 

"농부나 어부처럼 사진가도 기후의 변화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바람과 구름, 바다를 보고 일이십분 뒤의 기후 변화를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예측이 정확하다면 원하는 사진을 얻을 수 있다." (본문 중에서)

 

그는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그 감동까지 함께 나누고 싶어 사진을 찍었다고 하였더군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는 사진에 제목을 붙인 일이 없다고 합니다. 글로 표현할 수 없어 사진으로 찍었기 때문에 보는 이의 상상력을 제한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의 사진작품들이 얼마나 긴 시간과 지난한 기다림 끝에 촬영되었는지 그의 작업을 지켜보지 않는 사람들은 쉽게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에게 사진은 긴 호흡으로 이루어내는 '구도'이거나 혹은 어떤 인내심 같은 것의 결정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시사철 똑같은 장소에서 동일한 카메라, 동일한 방법, 동일한 목적으로 촬영해도 사진가마다 사진이 다르다. 어떤 순간이나 이미지를 상상하고 원하는 순간이 오기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쉽게 기다림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도 있고 기다림이 영원히 계속될 수도 있다." (본문 중에서)

 

그렇지만 좋은 사진이 기다림에 대한 보상이라고 하여 결코 우연의 산물은 아니라는 것이 작가의 주장입니다. 사진에는 작가의 생각이 개입될 뿐만 아니라 철저한 준비를 거쳐야 감동을 담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태양의 위치나 그날의 날씨 변화는 사진가가 개입할 수 없지만 원하는 순간을 기다릴 수는 있다. 셔터 누를 순간을 포착하는 것은 사진가의 의지다…… 운이 좋아야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행운은 사진가 스스로 준비해서 맞이하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사진은 일초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승부를 거는 처절한 싸움이다. 한 번 실수하면 그 순간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 특히 삽시간의 황홀은 그렇다. 그 순간을 한 번 놓치고 나면 다시 일년을 기다려야 한다. 일 년을 기다려서 되는 거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기다려도 되돌아오지 않는 황홀한 순간들도 있다." (본문 중에서)

 

그의 작품에 영혼이 담겼다고 하는 것은 운이 좋아 찍은 사진이 아니라 오랜 기다림과 철저한 준비 끝에 얻은 행운의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행운은 우연히 얻는 것이 아니라 '준비와 기회가 만나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가 평생을 바쳐 그렇게 찍은 사진들은 지금도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누가 시골 갤러리를 찾겠느냐고, 관람객이 없어도 실망하지 말라"고 걱정했던 그곳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삶의 전부인 사진들이 함부로 나뒹굴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루게릭병을 앓으면서도 갤러리를 만드는 데, 혼신의 노력을 쏟아 부었다고 합니다. 죽음이 다가오는 동안에도 그는 행복하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고 고백합니다. 사진에만 매달려 사는 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세상과 삶을 경험하면서 행복하였다는 것입니다.

 

오직 사진 하나에만 매달려 미친 듯이 살다간 이 남자가 궁금하시면, 제주에 가는 길에 꼭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을 가시기 바랍니다. 그의 사진을 보고 도대체 어떻게 저런 황홀경을 찍을 수 있었을까 궁금하다면 이 책 <그 섬에 내가 있었네>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제주 사람들도 모르는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이 영혼을 담아 찍은 그의 사진 속에 있습니다.

 

 

 

그 섬에 내가 있었네 (반양장) - 10점
김영갑 지음/휴먼앤북스(Human&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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