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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우리도 '물'처럼 싸워야 한다

멕시코, 미국과 FTA를 체결해서 경제가 무너진 나라, 할리우드에서 만든 많은 영화 속에서 크게 한탕한 범죄자들이 넘어가려고 하는 '새로운 세상', 혹은 거꾸로 수많은 가난한 민중들이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돈 벌이하러 떠나는 나라, 더 오래된 서부영화에서는 백인 카우보이 무법자들에게 힘 한번 못써보고 죽어가는 무능한 '악당'(?)에 대한 기억이 전부다.  

<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를 읽고 일부러 찾아 본 멕시코지도를 보며, 굉장히 영토가 넓은 나라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건국 초기에 미국과 전쟁에서 영토를 빼앗기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훨씬 큰 나라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혹시 그 전쟁에서 멕시코가 이겼다면, 지금 미국이라는 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하는 재미있지만, 소용없는 상상도 해보았다. 

멕시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부사령관으로 검은 스키마스크와 별 3개가 박힌 낡은 모자를 쓰고 다니는 마르코스가 쓴 <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2001년에 이미 한국에도 소개되었던 책이다. 이번에 재출간된 이 책은 일종의 수정증보판인데, 기존 이야기들을 고치고 새 이야기를 추가했으며 초판에 없던 삽화들을 담았다고 한다.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화가' 베아트리스 아우로라가 그린 삽화들은 '마야' 부족에 얽힌 신화에 잘 어울리는 그림들이다. 

<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라는 한 권의 책으로 엮인 이 글은 본디 사파티스타 부사령관인 마르코스가 1994년부터 2001년 사이에 각종 성명서와 편지, 토론회 발표문, 연설문으로 발표하였던 각종 문건에서 발췌하였다고 한다. 이 책 맨 뒷장에는 각각의 글 원문이 실렸던 문건이 언제 어떻게 발표되었는지 상세하게 밝혀놓고 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이런 배경지식 없이 그냥 <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를 읽는 독자들이라면 누구도 이 글이 좌파 혁명운동을 주도하는 사파티스타 부사령관이 쓴 글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책을 읽는 동안 혁명운동가들의 성명서라기보다는 마치 우화나 동화, 신화나 전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동화처럼 쉬운, 우화 같은 교훈이 담긴 혁명군 성명서 

마르코스 부사령관과 만나 쉼 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원주민 부족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문학적으로 창조된 인물이 아니라 실존 인물이었다고 한다. 1984년 치아파스의 라칸돈 정글에서 게릴라 활동을 시작한 마르코스 부사령관은 그해에 안토니오 할아버지를 만나서 1994년 6월에 죽을 때까지 아주 오랫동안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전한다.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사파티스타 해방운동 전사들에게는 매우 특별한 사람이었다고 전한다. 

그는 마르코스 부사령관을 만나 마야 부족의 신화와 전설을 통해 사파티스타 운동에 대한 전망을 차분하게 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1985년 처음으로 사파티스타 운동을 지지해준 첫  번째 마을이 바로 안토니오 할아버지가 살던 마을이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이후 사파티스타 혁명가들과 원주민마을이 서로 소통할 수 있도록 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안토니오는 이 책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꾼 할아버지였을 뿐만 아니라 혁명군이 "멕시코 남동부 산악지대에 사는 원주민들의 구체적인 어려움을 파악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안토니오 할아버지가 훌륭한 수단을 제공한 것이지요. 저는 그 수단을 제 것으로 만들어 원주민 세계와 도시 세계가 소통하는 데 충분히 활용한 것입니다. 그는 바로 오늘날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언어에 담긴 원주민 언어를 제공한 분입니다."(본문 중 - 마르코스 사령관 인터뷰 중에서) 

지은이 마르코스는 자신을 일컬어 "원주민 언어를 밖으로 실어 나르는 역할을" 하는 "그저 그의(안토니오 할아버지) 이야기를 옮기는 표절자"에 불과하였다고 말한다. 도시 출신의 사파티스타 혁명군 지식인들이 원주민들의 세계와 그들 문화와 소통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안토니오 할아버지라는 것이다. 

심지어 이 책을 한국어로 옮긴, 한국에서 유일한 라틴아메리카 전문 르포기자인 박정훈은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성공 열쇠도 바로 이 책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이 책을 번역하면서 나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을 창설한 도시 출신의 사회주의자 지식인들이 치아파스의 원주민들과 함께 살고 저항하면서 스스로 변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르코스는 안토니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게릴라들이 늘 훈장처럼 여기던 전위라는 '착각'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정통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따르면 도태될 사회계층으로 간주되던 원주민들이 자치운동의 주역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보았으며, 라틴아메리카 좌파의 영원한 숙제였던 민주주의와 다원성에 대한 깊은 성찰이라는 수확을 얻었다." - 옮긴이 머리말 중에서 

진실한 언어에는 없는 단어 '굴복' 

이런 과정은 결국 오늘날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활동이 멕시코에서 성공하는 좌파운동으로 정착되어가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마야의 후예인 원주민 부족이 신화와 전설이 어떻게 혁명군을 묶어세우는 힘으로 발휘되었는지 한 번 살펴보자. 

이 책에는 1994년 6월 10일에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이 발표한 성명서에 '추신'으로 담겼던 '진실한 언어에는 존재하지 않는 낱말'이라는 글이 있다. 당시 상황을 마르코스는 추위와 두려움을 벗어던지지 못하던 혁명군들은 몹시 추운 날씨와 끊임없이 내리는 비와 진흙 수렁에 빠져 기진맥진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바로 그때 혁명군 사령부에서는 어떤 작업을 위하여 원주민 언어에서 '굴복'이라는 단어를 찾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4개 부족의 원주민 언어 어디에서도 '굴복'이라는 단어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바로 그때 안토니오 할아버지가 마르코스부사령관 귀에 대고 속삭이는 이야기는 바로 다음과 같다. 

"그 단어는 진실한 언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네. 그러기에 우리는 절대로 무릎을 꿇지 않는다네, 차라리 죽음을 택하지. 우리 보다 먼저 죽은 이들은, 진실한 언어에 존재하니 않는 낱말들이 세상에서 생명력을 갖지 못하도록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명령한다네." - 본문 중에서 

혁명군은 어떤 경우에도 굴복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혁명군과 함께 싸우는 원주민 부족의 언어에는 '굴복'이라는 단어조차 없으며 그러한 단어는 세상에서 사용되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밤하늘의 별이 아름답게 빛나는 이유에 대한 비유를 담은 글 '밤과 별은 어떻게 생겨났을까?'는 1994년 전국민주주의대표자회의 토론 주제를 제안하는 성명서에 담긴 글이다. 이 글은 누군가가 빛나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가 반드시 스스로 빛을 꺼야만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마야 신화이야기다. 

하늘에 별이 아름답게 빛나는 이유 

아주 옛날 신들이 만든 세상에는 밤만 있었다고 한다. 신들은 사람들이 어둠으로 덮인 밤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어느 날 밤의 장막을 걷어내고 빛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단다. 그런데, 빛이 쏟아지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엄청난 빛을 감당해내지 못하여 불평하기 시작하였다. 신들은 결국 밤의 장막을 다시 놓았고, 오랜 고민 끝에 사람들에게 밤하늘에 별이 될 수 있도록 하였단다. 그런데, 사람들은 너도 나도 별이 되기를 바라였고, 마침내 너무 많은 빛이 쏟아져서 견딜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한다. 

어느 누구도 스스로 빛을 꺼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 진실한 남녀들은 먼저 나서서 자기 빛을 끄겠노라고 말한 뒤 바로 행동에 나섰다고 한다. 그들의 희생이 있어서 세상에는 어둠도 있고 빛도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를 빛나게 하기 위해 스스로 어두워져야 한다네. 사실 빛나는 이들은 빛을 끈 이들로 인해 밝게 빛나는 것이라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 그 누구도 빛 날 수 없다네." - 본문 중에서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밤하늘의 별을 빛나게 만든 이들은 신이 아니라 바로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결국, 밤하늘의 별이 될 수 있도록 해준 신은 누구도 빛날 수 없게 하고 말았지만, 바로 사람들이 스스로 결정하고 실천함으로 인하여, 진실한 남녀들로 인하여 밤과 별이 생겨나 아름답게 빛날 수 있었다는 지혜의 말을 전하고 있다.

1995년 9월 1일, 평화를 위한 제1차 민중투표를 마치고 시민사회에 보내는 성명서에 포함된, '지금은 물이 되어야 할 시간'은 오늘 이 땅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맞서서 촛불집회를 벌이는 우리들에게도 유의미한 이야기라고 생각되어 소개해 본다. 

물은 칼보다 강하다

칼을 이기는 물 이야기는 마야 원주민들이 외국인들의 침입에 맞서서 힘겹게 싸우면서 지혜로운 이들이 모여 주고받은 이야기라고 한다. 우리 속담에 있는 칼로 물 베기라는 말과도 상통하는 이야기이다. 바로 칼과, 나무와 바위 그리고 물의 힘자랑 이야기이다.

바로 그때 칼이 말했다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 나는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다. 이 예리한 날로 모든 것을 베어버릴 수 있다. 나를 잡는 자는 힘을 얻지만, 내게 대항하려는 자에게는 오직 죽음뿐이다." 

나무가 말했지. "내가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 난 거센 태풍이나 사나운 폭풍우에도 끄떡없어."

이번엔 바위가 말했다네.
"나야 말로 세상에서 제일 세지. 나는 아주 단단하고 오랜 세월을 버텨왔다. 게다가 내 속은 꽉 차 있고 아주 무겁지."

(물이 이 싸움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을 때) 칼이 물에게 말했다네. "너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약한 놈이야. 너는 결코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 나는 적어도 너보다는 강해."

개울가의 물과 맞서기 위해 칼이 힘차게 몸을 던졌지만, 물은 칼의 공격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냥 칼을 감싸고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물속의 칼은 낡고 녹슬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예리한 날을 잃게 되었다고 한다. 칼은 물보다 강해보이지만, 물을 해칠 수가 없었고, 물 또한 칼을 해치지 않았다. 그냥 싸움도 없이 칼을 굴복시켰을 뿐이다.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투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을 전사들에게 전해준다.

"동물들 앞에서는 칼처럼 싸워야 할 때가 있다. 폭풍우에 맞서서는 나무처럼 싸워야 할 때가 있다. 시간에 맞서서는 바위처럼 싸워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칼, 나무, 바위들과 맞서서는 물처럼 싸워야 할 때가 있다. 지금은 우리가 물이 되어야 할 시간이다. 우리의 길을 계속 가야 할 시간이다."(본문 중에서)

마르코스 부사령관은 성명서 말미에, 그 해 2월 정부군의 파죽지세와 같은 공격을 물처럼 싸워서 물리쳤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물은 칼과 같은 정부군 공격을 녹슬게 하고 계속 자기 길을 갈 것이라고 한다. 칼을 조용히 감싸 안은 채 무관심 한 듯 강을 향해 흘러갈 것이라고 한다.

막히면 돌아가고, 막히면 돌아가지만 끝내는 강으로 바다로 흘러가는 물처럼 싸우는 것이 마침내 승리하는 싸움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전해주는 마야 부족 이야기 가슴을 뜨겁게 한다. <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광화문에서부터 전국 방방곡곡과 인터넷 공간을 흐르는 물처럼 밀려다니는 촛불들이 결국은 승리하리라는 희망을 전해주는 메시지이다.

<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 마르코스 지음, 박정훈 옮김 - 현실문화/ 288쪽,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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